독서 기록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naduyes 2024. 4. 24.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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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말했다.'
 
무한회귀를 한다면 선택으로 인한 희생은 영원히 반복이 된다. 나의 선택은 무거움 짐으로 앞으로 영원히 고통받을 하나의 선택을 강요한다. 운명은 그렇게 반복되어 죽음에 죽음을 더하여 육체가 짓눌러 진다. 그 무거운 짐을 어떻게 하면 벗어 날 수 있을까? 긍정! 아모르 파티! 우리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이 무거움에서 벗어나 가벼움으로 날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운명을 벗어날수는 없다. 하지만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삶을 즐길수는 있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 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지상의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겨우 반쯤만 현실적이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우리가 운명을 받아들일수 있는 힘은 결국 사랑은 아닐지. 사랑은 동정심을 이끌며 운명을 거스르는 힘도 준다. 사랑이 없다면 '그래야 한다'를 외칠수 없을 것이다. 동정심이란 무거움을 사랑이라는 가벼움으로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무엇이라고 믿게 할 수 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삶도 더이상 삶이 아닐거라고 믿는다.
 
삶은 수많은 우연의 산물이다. 우리의 우연은 사실 믿을수 없는 숫자들일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숫자에 의미를 메기며 운명으로 여긴다. 우연을 운명으로 해독하려 애쓰며 그 우연을 우연으로 여기지 않고 의미가 있는 우연으로 여긴다. 과연 우연을 신비한 것으로 봐야할지 아니면 당연한 것으로 봐야할지. 우연을 숫자로 적어나가다 보면 확실히 희귀한 확률이며 일어날 수 없는 일로 여겨도 무방하다. 삶은 그런 희귀한 우연과 결합하여 현재를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당연한 순간으로 여겨 평범함으로 묻어버린다.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우리 각자는 어깨에 짐이 얹혀있다. 인생의 드라마는 항상 무거움을 갖고 있으며 이 무거움을 견디지 못하기도 하며, 이것과 싸우다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반복을 이해할수 없는 사람에게는 이 싸움은 무의미 없으며 지루하기만 할 것이다.
무의미를 의미로 바꿀 것도 의미를 무의미로 바꿀 것도 결국 삶 안에서이다.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꿀수도 있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삶은 키치로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의 더러운 부분은 내 보이기 싫은 한 부분이고 좋은 부분만 타인에게 보여지고 싶다. 하지만 나의 더러운 부분을 인정하지 않으면 나의 전부를 잃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경멸스러운 부분을 인정해야 인간을 이해할 수도, 타인에게 사랑을 받을수도 있다. 우리의 삶은 아름다운 예술과 더러운 예술의 경계에 있다. 그 모든 것을 경험하는 것이 삶이다.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다가가 단지 그의 존재 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사랑)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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