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기록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 - 백상현

naduyes 2024. 11. 27.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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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미술관의 유령들
존재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윤리라고 말했다. 그것은 다시 말해 강제된 세상의 법과 권력에 무조건적으로 순응하는 것은 가장 비윤리적인 행위라는 뜻이기도 하다.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은 이러한 라캉의 윤리적 명제―끝까지 욕망하고, 끝까지 저항하라―를 ‘유령이미지’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다양한 예술작품 속에서 풀어낸 책이다.    이때 ‘유령이미지’란 우리가 안주하려는 세계의 허상을 폭로하는 존재로
저자
백상현
출판
책세상
출판일
2014.08.31

진리를 찾기위한 여정

새로운 아름다움의 실존에 대한 이러한 신념은 주 체가 세계 질서가 강요하는 가면들을 전혀 다른 방 식으로 썼을 때 일어나는 일들과도 관련이 있다. 삶 을 살아가기 위해 어차피 가면을 써야 한다면(자신 의 초월적 자아, 가면 뒤에 실존하는 진리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으니) 소피 칼은 그것들을 자신의 가능 성에 대한 신념에 근거해서 써야 한다고 말한다. 자 신의 정체성을 고착하기 위해 가면을 쓸 것이 아니 라, 내부에 존재하는 순수한 가능성의 영역인 공백 으로 접근해 들어가기 위한

맹인의 응시는 시각의 상실로 인한 모든 이미지의 상실이라는 슬픔 속에서만 도달할 수 있는 행복을 표상하며, 바로 그렇게 때문에 '슬픔은 행복의 형 식'이 된다

맹인들은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지금 우리가 결코 볼 수 없는 '대상'을 보고 있으며, 반대로 우리는 모든 것을 보는 듯하지만 저 맹인들 이 보는 것을 볼 수 없다.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 하면서 모든 것을, 진리를 보 려고 하는 '텅 빈' 응시에 도달한 그녀는 그렇게 객 실의 한 구석에 서서 자신의 고유한 공백과 만나게 된다. 이와 같은 '응시'의 출현은 이미 1부에서 살 펴보았던 대타자의 응시, 공포의 응시에 대한 가장 적절한 '승화'의 결과물로 간주할 수 있다. 소피 칼 은 그렇게 '타자에 대한' 또는 '세계 자체에 대한' 관음증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곳에서 응시하고 있는 타자의 공포스러운 눈에 접근하고, 이와 같은 응시를 공백에 대한 '우리 자신의 응시'로 승화하는 과정을 작품을 통해 보여준 것이다.

세계의 사물들을 명확히 구별해주는 윤곽선의 선명 함에 사로잡히는 대신 흐릿한 시각 장애의 상태, 아 무것도 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보려는 응시의 눈 빛을 욕망하게 될 테니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각자의 내부에 이러한 공집합을 하 나씩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세계 질서 속에서 한 인 간이 하나의 반복되는 이미지로서 자신을 등장시킬 때조차 결코 반복될 수 없는 얼룩과 같이 출현하여 세계 질서를 오염시키고, 때에 따라서는 그것에 기 능 장애를 일으킨다.

반복될 수 없는 것, 그것은 바로 공백이다

두 이미지 사이의 미세한 차이가 그 둘이 서로 다른 것이라 주장할 수 있는 온전한 근거가 되지는 못한 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이 유 때문에 두 개의 반복 이미지가 결코 완전히 같은 것일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받아들여져야 한다.

기계적 반복 속에서 모든 사물의 다양성을 획일화 하는 유니폼화 현상, 즉 규격화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반복'은 대량생산과 대량복제를 특징으 로 하는 자본주의 문화의 가장 본질적인 기능이다

유령이미지의 출현은 결국 삶의 질서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세계의 질서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폭 로하면서 우리에게 다시 그리고 더' 욕망할 것을, 세계에서의 삶을 처음부터 '매번' 다시 시작할 것을 강제한다.

모든 쾌락의 본질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우리 에게 익숙한 것을 언제나 새롭게 '변주'하여 제공하 고, 우리의 지적 긴장이 그 한계를 초과하지 못하게 하는 수준에서 통제하는 것 말이다.

인류가 이미지들을 길들이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미지들의 질서화된 형상을 지도 삼아 도달하게 되는 진리의 장소에서 진리 자체를 소유하고자 하 는 욕망 때문이었다.

유령이미지의 가장 본질적인 효과는 바로 없는 것 을 사유할 수 있도록 하는 역능에 있다.

세계를 가득 채우며 자신의 영원성을 자랑하던 모 든 진리의 의미들, 실체로서의 이데아들이 결국은 판타즘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허무의 깨달음에 도달 하는 것이다(이것이 바로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애 도와 승화의 단계이다)

주어진 어떠한 보편적 상식에도 의존하지 않고 곧 장 존재의 본질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 즉 공백의 가장자리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란 그렇게 주어 진 모든 의미들의 질서와 연대를 해체하는 이미지 들, 즉 소멸하는 이미지들의 흔적을 통해서 가능했 다. 만일 여기서 고야가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이미 지들로 그림을 채웠더라면 결과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세계의 지식으로는 결코 알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출현하는 진리의 사건. 그것은 우리가 무시해도 좋 을 만큼 초라하거나 상식 밖의 기괴한 형상으로 나 타날 수 있다. 진리의 형상에 대한 이 같은 역설적 관점은 진리를 다루는 역사 속에서, 최소한 미술의 역사 속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하나의 작품은 언제나 앞선 작품들(역사)에 대한 응 답이다. 앞선 예술가들이 작품을 통해 그려낸 인간 (주체)과 세계(구조)와 진리(공백)의 3자 관계를 지 배하는 질서에 때로는 동조하고 때로는 저항하면서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을 세계와 관계 맺게 한다. 예 술가가 이처럼 역사와 대화하는 이유는 그 자신이 이미 역사의 권력에 사로잡힌 채 태어나기 때문이 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넘어설 것인가 아니면 역사를 반복할 것인가'는 예술가에게 주어진 화두이다

세계의 시간을 중단시키는 광기에 의해 작품은 공 백, 침묵의 시간, 대답 없는 물음을 접근 가능하게 끔 열어놓고, 세계가 정말로 의문의 대상이지 않을 수 없게 끝없는 분열을 일으킨다

라캉에게 진리는 텅 빈 공백의 심연이었고, 이와 같 은 공백을 욕망한다는 것은 현존하는 모든 종류의 지식과 질서를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거부는 엄밀한 의미에서 윤리적인 것인데, 왜냐하 면 세계의 질서 잡힌 이미지들이란 실재하는 유일 한 것인 공백을 은폐하기 위해 펼쳐진 거대한 환영 의 스크린이기 때문이다.

화가들은 우리 모두가 꼭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것을(진리를) 보여주겠다고 하지만, 오히려 진리 자체를 은페하는 일종의 마술사들, 미혹하는 자들 이다. 왜냐하면 진리란 우리가 지금 속해 있는 삶의 질서를 전복시키면서 세계를 위기 속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회화는 이와 같 은 진리의 위험을 방어하는 가장 우아한 수단이었 다.

주체의 욕망은 주체의 정체성을 보여주는데, 문제 는 주체의 고유한 욕망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데 있 다. 주체의 욕망은 언제나 타자의 욕망을 흉내 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해석과 의미 부여의 그물로 촘촘히 짜인 이 미지들의 안전망 속에서 보호받고 있지만, 그와 같 은 안전망이 우연한 사고 속에서 흔들리고 해체되 는 순간, 예를 들어 극단적인 스트레스 속에서 자기 통제의 끈을 놓쳐버리게 되는 순간, 자신을 모든 곳 에서 응시하고 있는 어떤 사악한 눈의 존재를 느끼 고 공포의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응시란 본질적으로 욕망하는 눈이며, 욕망이란 원 래 결핍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주체가 '자신의 불 완전함을 호소'하는 또 다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완전한 자는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런데 이러한 타자의 욕망 앞에 노출된 사람은 타자 의 응시가 원하는 것을 결코 충족시켜줄 수 없다.
왜냐하면 응시란 언제나 지금 눈앞에 제시된 바로 그것이 아닌 더 많은 것을, 더 깊은 것을, 주어진 그 것 너머의 다른 것을 탐욕스럽게 욕망하기 때문이 다.

인간이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면서 자신의 심리적 안정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화가들은 방어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러한 방어의 대상은 우리 세계의 바닥의 가늠할 길이 없는 공허 와 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유령이미지들에 다름 아니다. 화가들은 '시관적 장‘의 이미지 영역에서 그러한 유령들이 출현하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었

매너리즘은 고전주의만큼이나 진리에 대해 오해하 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충동이라는 개념 을 통해서 암시했던 것처럼, 눈앞에 출현한 사물의 궁극적인 (비)존재는 공백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서의 사물의 본질은 공백, 즉 텅 비어 있음'이다. 매너리즘은 그 공백을 사유하 게 하는 대신 그곳에 신비로운 이미지를 채워 넣음 으로써 주체의 응시가 완전한 공허의 진리에 도달 하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비켜가고 있다. 결론적으 로 말해서, 매너리즘 역시 공백의 진리가 지닌 허무 를 견뎌내지 못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매너리즘은 고전주의만큼이나 진리에 대해 오해하 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충동이라는 개념 을 통해서 암시했던 것처럼, 눈앞에 출현한 사물의 궁극적인 (비)존재는 공백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서의 사물의 본질은 공백, 즉 텅 비어 있음'이다. 매너리즘은 그 공백을 사유하 게 하는 대신 그곳에 신비로운 이미지를 채워 넣음 으로써 주체의 응시가 완전한 공허의 진리에 도달 하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비켜가고 있다. 결론적으 로 말해서, 매너리즘 역시 공백의 진리가 지닌 허무 를 견뎌내지 못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질서화된 이미지들의 안정적인 순환 속에서 살아가기를 욕망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미지들 중 에서 초과하는 것이 있을 경우 적대감을 드러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마녀 이미지는 한 사회의 구조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초과하는 이미지'의 종교적 유형이었을 뿐이며, '이단'이라는 적극적인 대립항 으로서보다는, 일종의 '모호함' 또는 '은밀함'과 같 은 불확실성에 지배되는 이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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